1793년 2월25일 스웨덴 국왕이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동쪽 땅에 위치한 누타강(Nuutajarvi)변 작은 마을에 유리창문용 유리를 제조하는 공장 설립을 승인했다. 공장 설립자는 1755년생 해군장교였던 야콥 빌헴 드 폰트 (Jacob Whilhelm de Pont)로 그는 이미 다른 마을에 유리 공장을 운영했던 아버지로부터 누타예르비 저택 (Nuutajarvi Manor)과 부속 토지를 상속받았다. 야콥은 산업용 유리에 대한 시장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으로 믿었는데 실제로 당시 시장은 산업용 유리의 공급 부족사태를 겪고 있었다. 특히 그가 상속을 받은 마을은 흐르는 강과 우거진 숲이라는 공장에 적합한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었기에 그는 인근의 또 다른 지주와 함께 유리공장을 짓기로 결심했다. 당시 스웨덴 왕실은 현재의 핀란드인 ‘스웨덴의 동쪽 땅’에 유리공장과 제철공장 설립에 상당히 우호적이었기에 승인은 어렵지 않게 나왔다. 하지만 야콥 자신은 군인의 신분이었고 누타예르비 마을에는 유리 기술자가 부족했다. 그는 유럽대륙의 유리 기술자들을 영입하며 핀란드 글라스 디자인과 아트를 대표하는 현재의 누타예르비 글라스 빌리지의 주춧돌을 세우기 시작했다. 1793년 2월25일 스웨덴 국왕이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동쪽 땅에 위치한 누타강(Nuutajarvi)변 작은 마을에 유리창문용 유리를 제조하는 공장 설립을 승인했다. 공장 설립자는 1755년생 해군장교였던 야콥 빌헴 드 폰트 (Jacob Whilhelm de Pont)로 그는 이미 다른 마을에 유리 공장을 운영했던 아버지로부터 누타예르비 저택 (Nuutajarvi Manor)과 부속 토지를 상속받았다. 야콥은 산업용 유리에 대한 시장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으로 믿었는데 실제로 당시 시장은 산업용 유리의 공급 부족사태를 겪고 있었다. 특히 그가 상속을 받은 마을은 흐르는 강과 우거진 숲이라는 공장에 적합한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었기에 그는 인근의 또 다른 지주와 함께 유리공장을 짓기로 결심했다. 당시 스웨덴 왕실은 현재의 핀란드인 ‘스웨덴의 동쪽 땅’에 유리공장과 제철공장 설립에 상당히 우호적이었기에 승인은 어렵지 않게 나왔다. 하지만 야콥 자신은 군인의 신분이었고 누타예르비 마을에는 유리 기술자가 부족했다. 그는 유럽대륙의 유리 기술자들을 영입하며 핀란드 글라스 디자인과 아트를 대표하는 현재의 누타예르비 글라스 빌리지의 주춧돌을 세우기 시작했다. 누타예르비 글라스 빌리지 글라스 공장과 구내식당 / 사진 : Marko Östman 1849년 산업가 아돌프 톤그렌 (Adlof Torngren)이 누타예르비 저택을 포함한 글라스 빌리지를 상속받았을 때가 그의 나이 스물 일곱 살이었다. 혈기 왕성한 그는 당시 유리창문 용 윈도우 글라스 생산에 만족하지 않고 마을과 공장을 대대적으로 혁신해 세계시장으로 뻗어나가고자 했다. 이 일환으로 핀란드인 직원 대부분을 해고하고 유럽 전역에서 기술자들과 재무 전문가 등 사업 확장에 필요한 인력을 채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을 영입하기 위해 마을 전체를 레노베이션해 외국인 글라스 기술자들 (glass blowers)을 위한 생활 환경을 제공했다. 이러한 외국인 인재 영입 전략의 일환으로 1853년 1월 독일 북구 뤼베크 (Lübeck) 출신인 게오르그 프란츠 스토크만 (Georg Franz Stockmann)이 누타예르비에 도착했다. 그는 글라스 공장의 재무를 담당했을 뿐 아니라 때로는 프랑스 글라스 블로어들과 핀란드 글라스 블로어들 사이에 통역을 맡기도 했다. 이후 스토크만은 누타예르비 공장에서 생산된 글라스 제품을 판매할 상점을 헬싱키에 오픈하는 임무를 받아 헬싱키로 떠난다. 시간이 흐른 후 그는 이 상점을 직접 인수하게 되는데 바로 이 상점이 이후 핀란드 최대 백화점인 스토크만 백화점으로 성장한다. 스토크만과 얀손이 근무했던 누타예르비 Wood Office (Puukonttori) / 사진: Maiju Viitanen 글라스 빌리지 마을 한 가운데 있는 Wood Office 건물에서는 핀란드 백화점 창시자였던 재무담당 스토크만 뿐 아니라 핀란드 문화에 거대한 영향력을 끼친 또 다른 인물 빅토르 얀손 ( Viktor Jansson)이 건물 내의 작은 상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세계적인 동화작가이자 예술가인 무민의 창시자 토베 얀손 (Tove Jansson)의 증조부다. 1950년대 이후 누타예르비를 이끈 아트 디렉터 카이 프랑크 역시 이 Wood Office에서 근무하기 시작해 그의 커리어 마지막까지 이 곳을 지켰던 곳이기도 하다.1950년 6월 대화재로 누타예르비 글라스 빌리지가 사라질 운명에 처했을 때 핀란드 대기업 바르칠라 (Wartsila)가 누타예르비의 중요성과 가능성을 보고 글라스 공장을 인수했다. 거대 산업 그룹인 바르칠라의 인수로 글라스 공장은 대대적인 현대화의 변화를 맞았으며 처음으로 아트 디렉터를 고용해 산업용 제품 뿐 아니라 생활용품에 디자인적인 요소와 예술적 요소를 접목하는 혁신을 시도했다. 이 첫 아트 디렉터가 핀란드 현대 산업 디자인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카이 프랑크다. 그의 리더십하에 누타예르비에서 글라스 블로어들과 아티스트들의 협력이 활발히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세계적인 글라스 디자인의 산실로 성장했다. 누타예르비 글라스 디자인 뮤지엄 / 사진: Riitta Sourander 글라스 공장에서는 글라스 블로어들의 월급에 하루 5리터의 맥주가 포함되는 것이 전통이었다. 아돌프 톤그렌이 1850년대 중반 외국 글라스 블로어들을 고용할 때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기술자들을 영입하기 위해 양조장을 지었다. 1977년 누타예르비가 또 한번의 변화를 겪으며 카이 프랑크가 양조장을 글라스 뮤지엄으로 변화시켰지만 마을 사람들이 이 뮤지엄을 아직도 ‘양조장 Prykari”으로 부르는 이유다.누타예르비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유리에 컬러를 넣는 기술을 활용하기 시작하면서다. 색이 들어가는 글라스는 1950년대 카이 프랑크의 리더십하에 시작되었는데 진한 초록과 파랑, 루비 톤의 색을 시리즈로 생산하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아트 글라스도 제작을 시작하면서 누타예르비는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 이전까지 유리는 투명유리가 일색이었기 때문에 선명한 색이 들어간 글라스에 시장은 뜨겁게 반응했다. 이러한 기술적 전통은 누타예르비의 글라스 스쿨 Nuutajarvi Glass School (Tavastia Vocational College, glass crafts)을 통해 지금까지 전수되고 있는데 카이 프랑크가 디렉터로 활동하던 그 핫샵 (글라스 블로잉이 일어나는 작업 현장을 hotshop이라고 한다) 에서 현재도 학생들이 글라스메이킹을 훈련받고 있다. 누타예르비 글라스 뮤지엄 / 사진: Irene Suosalo 현존하는 핀란드 글라스 디자이너자 아티스트 중 최고를 꼽으라고 한다면 마르쿠 살로와 카밀라 모베르그를 거명하겠다. 누타예르비에서 거주하며 글라스 아티스트로서 일생을 보내고 있는 마르쿠 살로의 레지던스는 누타예르비 글라스 빌리지의 역사적 유산이기도 한데 붉은 페인트가 칠해진 오래된 목조가옥은 핀란드의 전통적인 목조 주택으로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호 보존되고 있다. 마르쿠 살로와 그의 아내 마르야레나가 매입하여 레지던스로 사용하기 전까지 이 붉은 목조주택은 1800년대 누타예르비 글라스 공장에서 작업을 하던 글라스 블로어들의 기숙사로 사용되다가 1900년대 대기근 시대에는 병원으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살로 부부가 매입 후 핀란드 국가고전문화재위원회의 감독하에 대대적인 보수과정을 거쳐 과거의 유산을 아름답게 품고 있는 마르쿠 살로의 레지던스로 재탄생되었다. 마르쿠는 누타예르비에서 레지던스 뿐 아니라 그의 작업 스튜디오와 컬렉션을 전시하는 갤러리 또한 운영하고 있다. 누타예르비 글라스 스쿨 / 사진 : Maiju Viitanen 누타예르비에서 절대로 빠트려서는 않되는 또 한 사람의 거장, 오이바 토이까 Oiva Toikka (1931-2019). 이딸라와 함께 오랫동안 일하면서 창조한 그의 새 Bird 시리즈는 40년 동안 누타예르비 글라스 공장에서 태어났다. 그의 첫번째 새 Flycatcher 가 1972년 첫 날개짓으로 누타예르비를 나른 이래 2014년 그의 마지막 새가 누타예르비의 창공을 날아가기까지 40여년간 오이바 토이까는 누타예르비 글라스 빌리지의 진정한 리더였다. 한 나라의 핵심 문화유산이 그 유산을 상속받고 이후로도 후대에 상속할 장인과 예술인이 거주하며 작업을 함과 동시에 후대를 위한 교육까지 이루어지고 있는 수백 년간 ‘살아있는 마을’로 온전히 보존되고 있는 곳은 전 세계적으로 많지 않다. 2023년이 되면 누타예르비 글라스 빌리지가 230주년을 맞는 해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기업인들과 그들의 끊임 없는 혁신, 유럽 대륙 전역에서의 인재 영입, 인재 영입을 위한 근무환경 조성, 산업 제품에 예술적 요소를 접목한 시대를 읽는 혜안, 자연재해와 산업 공동화로 사라질 운명에 처했지만 끈질긴 변화와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한 치열한 노력으로 누타예르비는 230년의 생명력을 이어왔다. 누타예르비 글라스 빌리지를 상징하는 거대 유리 설치 작품과 마르쿠 살로의 갤러리가 위치한건물 / 사진 Maiju Viitanen 본 글은 Seoul Property Insight에 기고되었던 기사입니다. 원문은 링크 참조.https://seoulpi.io/article/835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