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미술품 약 20000여점을 소장한 핀란드 국립미술관 아테네움은 1887년 완공, 1888년 개관이래 핀란드 예술의 심장이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화려한 대리석 계단이 좌.우를 나누고 있는 네오 르네상스 양식의 아테네움은 건축 초기 당시 한 쪽에는 헬싱키 미술대학이, 또 다른 한 쪽에는 응용 미술을 가르치는 디자인스쿨이 자리했다. 미술대학은 1980년까지 같은 자리에서 100여년 동안 예술가들 배출해내었으니, 작품들이 반듯하게 진열된 건물로서의 미술관을 넘어 살아 숨쉬는 예술혼이 깃든 역동적인 삶의 현장이기도 했다. Photo: Finnish National Gallery / Yehia Eweis 아테네움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팔라스 아테나 Pallas Athena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를 모시는 신전을 의미한다. 아테네움 건물의 박공벽 (페디먼트, pediment) 꼭대기 정중앙에 얹혀진 아크로테리움에 헬멧을 쓴 아테나의 얼굴이 부조되어 있다. 아테나는 전쟁의 여신으로서 도시와 국가를 보호할 뿐 아니라 건강과 치유, 아름다움의 기원까지 깃들어 있으니 예술의 본질을 매우 잘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국가가 구성원들의 응집력을 필요로할 때 음악, 미술, 문학과 같은 매체는 큰 힘을 발휘한다. 또한 예술이 주는 시각적, 청각적, 심상적 아름다움은 회복과 치유의 힘을 갖는다. 인류가 겪는 어떠한 질고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언제나 그 뿌리를 지킬 뿐 아니라 고난 속에 더 큰 줄기와 잎을 키워왔다. 국가를 지키는 힘은 군사력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통해 사회 구성원들의 생각을 보다 고도화시키고 예술이 갖는 지적 가치를 통해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의 공존과 공생, 조화와 균형을 찾아가는데 있다. 이런 점에서 핀란드 국립미술대학으로 출발하고 이후 국립미술관이 된 이 건축물과 아테네움이라는 이름은 최고의 궁합이라고 할 수 있겠다.예술이 갖는 지적가치 intellectual value란 무엇인가? 창작자가 바라보고 느끼는 감정과 사유를 색과 형태로 시각화하는 과정을 거쳐 창작자만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예술의 언어라 할 수 있겠다. 이 언어는 감상자로 하여금 현상을 인지하고 새로운 시각을 갖도록 돕거나 정리되지 못했던 표류하는 생각들을 하나의 ‘관점’으로 명료화할 수 있게 유도한다. 예술을 통한 메시지는 언제나 개인적 해석 personal interpretation 에 대한 여지를 두고 있기에 감상자는 강요되지 않은, 자유의지에 의한 자발적 사유를 한다. 선동 propaganda이 아닌 영감 inspiration, 그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예술에 매료되게 인도하는 것이다. 작가의 세계를 형태화하여 세상에 프리젠테이션하고, 감상자가 작품을 바라봄으로써, 즉 화자와 청자의 행위가 서로 교감되는 순간 새로운 힘을 갖는 에너지가 생성된다. 독립적인 분자 molecule 들이 떠다니다가 서로 결합을 하게되면 새로운 물질이 되고 물질과 물질이 만나 예상치 못했던 에너지를 형성하듯 창작자와 감상자가 만나는 순간 개별의 분자로는 낼 수 없었던 새로운 차원의 힘을 만들어낸다. 창작자의 현상 인식과 표현은 그래서 궁극적으로 어떤 ‘변화’의 파문을 일으키는 엔진의 역할을 한다. 흥미롭게도 작가의 작품이 작가의 손을 떠나 감상자를 만나는 순간 작가의 개인적 해석 personal interpretation이 탈개인화 de-personalization 된다. 작가의 메시지는 해체, 재해석, 재조립되어 감상자의 개인적 차원 personal dimension 으로 변이된다. 작품이 영구적인 생명력을 갖기 위해서는 결국 개인화-탈개인화-재개인화를 거쳐야만 한다. 이렇게 예술은 에너지가 되고 생명력을 갖는 또다른 차원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며, 예술이 일으키는 이 모든 활동과 진보성을 예술의 지적가치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예술의 가치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므로 신화의 존재가 끼여들 여지가 있다. 아테나의 신전, 아테네움은 그 이름만으로도 예술을 추구하는 인간의 갈망을 잘 드러내는 듯 하다. 해마다 60만명의 방문자들이 위대한 예술 작품과의 조우를 위해 아테네움 계단을 오른다. Photo: Finnish National Gallery /Hannu Pakarinen 1층과 2층에 자리한 상설전시관 ‘the Stories of Finnish Art’는 아테네움이 영구소장하고 있는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어 1809년부터 1970년도까지 핀란드 미술사의 다양한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또한 르 코르뷔지에의 <두 여인, 1939>과 에드바르 뭉크의 <목욕하는 남자, 1907~1908> 와 같은 유럽화가들의 작품도 함께 핀란드 시대상황에 맞게 전시되어 있다. 이밖에도 세잔느, 샤갈, 고갱, 반 고흐, 페르낭 레제, 피카소, 모딜리아니 등 세계적인 화가들의 작품도 만나볼 수 있다.건축물은 디자인과 재료, 장식과 구조에 그 공간의 목적성과 철학을 잘 담고있을수록 생명력이 길다. 스토리텔링이 풍요로울수록 사람들은 의미를 공감하고 공간에 대한 애정을 쌓아가기 때문이다. 아테네움 건축물을 좀더 들여다보자. 파사드는 건축, 기하학, 회화, 조각으로 상징하는 4개의 카리아티드 (caryatids, 그리스 신전 건축양식에서 기둥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여인상)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 처음부터 건축과 미술, 디자인과 공학을 융합적 사고로 접근하는 핀란드 미술대학의 교육관을 건물 정중앙에 선언하고 있는 듯하다. Ateneum Art Museum. Photo_Finnish National Gallery /Ville Malja 페디먼트에 새겨진 라틴어 “Concordia Res Parvae Crescunt”, 즉 “화합은 작은 것들도 풍성히 자라게한다” 는 문구는 화합의 중요성을 믿는 핀란드라는 작은 나라의 국가철학을 잘 묘사한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 이 문구는 뒤에 “Discordia maximae dilabuntur”, 즉 “불화는 위대한 것도 파멸시킨다.”는 글귀가 따라오는데 앞문구만 아테네움에 새겨넣은 것이다. 핀란드보다 훨씬 강국인 스웨덴과 러시아 사이에서 900여년간 핀란드라는 독립된 국가로 존재하지 못한체 ‘스웨덴의 동쪽 땅’, ‘러시아의 서쪽 땅’으로 머물렀던 핀란드인들에게 작은 인구들간의 ‘화합’은 곧 유일한 생존의 방법이었다. 핀란드내에서 이념분쟁에 의해 야기된 내전의 상처도 이 화합의 정신으로 극복했고, 사회적 안정과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서도 화합은 보이지 않는 사회적 인프라 SoC로 작용하고 있다. 다만, 임시 방편이나 봉합차원의 덮어두기식 접근이 아니라 장기적이고 근본적으로 사회적 화합을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핵심가치들을 바로세운다. 예를들면 국가 교육철학으로 ‘한 명의 낙오자도 생기지 않도록 모두 품고간다’ 라는 의식, 사회적 약자들을 포용하고 배려하는 양성평등주의와 차별철폐 정책, 자연이 내린 선물인 숲과 호수에 대해서는 돈을 가진 소유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접근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만인의 권리’와 같은 사회적 합의, 경제적 곤란이 인간의 존엄성 추락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보호하는 복지 정책 등 다양한 사회적 장치들을 마련하여 안정적 사회적 화합을 시스템화 시킨다. 학교에서는 철저하고 구체적으로 교사와 학생에게 민주주의와 인권을 교육하여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서로를 존중하며, 투명하고 공평한 절차를 통해 민주주의를 실생활 속에서 실천하고자 노력한다. 척박한 자연환경, 적은 인구, 부족한 자원 등 강대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지 못한 작은 나라이지만 결국 사람들간의 화합, 사람과 자연과의 화합을 소중히 여김으로서 작은 요소들을 결속시키고 효율화시켜 작지만 강한 나라가 될 수 있었다. 아테네움 건물이 완공된 1887년은 아직 핀란드가 러시아의 지배하에 있을 때였으므로 자신들만의 화합과 응집의 중요성을 마음에 아로새기고자 한 것 아닐까.예술이 사회에 ‘있으면 좋은 것 good to have’ 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것 must to have’임을 핀란드 국립미술관 아테네움 건축에서 배운다. 한 나라의 정신세계를 응축하여 소통하고 사회가 계속 진보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지적가치를 새로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자본이자 척추인 예술, 그를 담아 화합의 미래를 그려내는 미술관에 우리 모두 각별한 애정을 주어야할 이유이다.본 글은 Seoul Property Insight에 기고되었던 글입니다. 원문은 링크 참조. https://seoulpi.io/article/407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