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rvenpaa 얘르벤빼에서 만나는 시벨리우스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북쪽으로 35km가량 떨어진 인구 44,000명의 작은 도시 얘르벤빼Järvenpää에는 특별한 장소가 있다. 이 생소한 이름의 도시에 교향시 핀란디아, 20세기 최고의 바이올린협주곡 중 하나로 꼽히는 바이올린 콘체르토 D단조의 작곡가 장 시벨리우스 Jean Sebelius (1865~1957)가 50여년간 살았던 집, <아이놀라 AINOLA>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이놀라는 시벨리우스의 아내의 이름 <아이노 Aino>와 핀란드어로 ' ~와 관련된 장소(place associated with ~)’ 라는 단어를 만드는 장소형 접미사 <la> 가 합성되어 '아이놀라의 집' 으로 해석된다. 시벨리우스 가족은 1904년 9월 아이놀라로 이사한 후 아이노가 사망한 1969년까지 약 65년간 이 곳에서 생을 보냈다. 시벨리우스의 많은 곡들이 아이놀라에서 탄생했으며 시벨리우스 부부가 생을 마감하고 이 곳에 함께 묻히기도 했다 . 아이노가 시벨리우스 곁으로 떠난 후 자녀들은 아이놀라를 원형 그대로 보존하여 박물관으로 대중에게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에 따라 1972년 아이놀라 재단 The Ainola Foundation이 설립되었고 이후 시벨리우스 소사이어티 The Sibelius Society 의 주선으로 같은 해에 아이놀라의 소유권을 핀란드정부로 이전하는 계약이 체결되었다. 핀란드 국립문화재청과의 협약에 근거하여 현재 아이놀라의 유지보수와 박물관 운영은 아이놀라 재단이 맡고있다. 은방울 꽃이 자라는 작은 언덕 위에 위치한 시벨리우스 가옥 아이놀라 Tuusula Art Community 아이놀라가 위치한 뚜술라 호수 Lake Tuusula 수변과 인근에는 아이놀라를 포함해 핀란드문화예술의 황금기로 불리는 19세기~20세기초 최고의 핀란드 예술가들이 커뮤니티를 이루어 살았던 문화유산이 온전히 보존되고 있다. 시벨리우스의 ‘베프’ 였던 핀란드의 대문호 유하니 아호 Juhani Aho 와 그의 아내 화가 베니 솔단 브로펠트Venny Soldan_Brofeldt 가 먼저 뚜술라 호숫가에 집을 짓고 (이 집의 이름은 아홀라 AHOLA) 예술가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시벨리우스의 아내 아이노의 오빠이자 핀란드를 대표하는 위대한 화가이며 또다른 시벨리우스의 ‘베프’ 였던 에로 예르네펠트 Eero Jarnefelt역시 아홀라 인근에 집을 짓고 이사를 했다. 시벨리우스 역시 작곡활동을 위해 소란스러운 도시 헬싱키를 떠나 조용한 시골 생활을 오랫동안 꿈꿔왔다. 문화의 중심지 헬싱키와 기차로 연결되는 근접성, 친척이자 예술가이자 친구들이 모여사는 예술가 커뮤니티, 아름답고 평화로운 뚜술라 호수는 핀란드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작곡가 장 시벨리우스와 그의 가족을 작은 시골마을 얘르벤빼로 이끌었다. 뚜술라 호수 Tuusula Lake / Photo : Visit Tuusula 은방울꽃 언덕위에 핀 아이놀라 사실 시벨리우스 가족이 거주하던 헬싱키의 다세대 주택은 소리에 극히 민감한 시벨리우스가 작곡활동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음악 작업을 하는 동안 시벨리우스는 일절 소음이 없는 절대적으로 조용한 환경을 필요로했는데 아파트 다른 세대에서 들려오는 생활소음은 그를 극도로 예민하게 만들곤 했다. 시벨리우스에게 시골의 전원주택은 가족을 위해서도 필요했지만 무엇보다 그의 음악적 성공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환경이었다. 1903년 여름 마침내 시벨리우스는 오랫동안 물색해오던 투술라 호수 근처 ‘은방울꽃 언덕 Lily of the Valley Hill’ 이라 불리는 나즈막한 언덕위에 적당한 주택부지를 발견했다. 1903년 11월 시벨리우스는 새로운 인생을 써내려갈 수 있는 토지를 매입하고 건축공사를 시작했다. 은방울 꽃이 가득한 아이놀라의 정원 바이올린 콘체르토 D단조 1903년 가을 완성 후 1904년 2월 헬싱키에서 초연되었던 그의 바이올린 콘체르토 D단조는 엄청난 혹평으로 시벨리우스를 좌절시켰다. 하지만 아이놀라로 이사한 직후 그는 주변의 권유로 작품을 대폭 수정하여 1905년 베를린 공연에서 대성공을 거둔다. 아이놀라의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삶의 환경은 그만큼 시벨리우스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아이놀라는 거친 파도를 타는 시벨리우스의 음악 여정에서 언제나 한결같이 제자리에서 은은한 불빛을 밝혀준 등대와 같은 존재였다. ‘집 Home’이란 그런 것 아닐까. 크기와 가격, 화려함에 상관없이, 마음이 편안한 곳, 지친 몸과 마음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 언제나 늘 같은 자리에서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고 다독여주는 가족이 있는 곳, 내가 성장할 수 있도록 조용히 인내하며 나를 기다려주는 곳, 고요와 침묵이 가장 힘찬 응원이 되어주는 곳. 시벨리우스가 ‘시벨리우스’일 수 있었던 이유는 어떤 상황에서도 한결같이 그의 창작활동을 존중해주고 배려해주고 자랑스러워했던 가족이 곁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놀라 서재에 앉아있는 장 시벨리우스 : 사진제공 : The Finnish Heritage Agency 딸을 잃은 슬픔 뚜술라 예술인 마을로 이주하기 얼마전 시벨리우스 가족은 잊지 못할 비극을 맞이했다. 아이노는 극심한 우울증을 겪었고 시벨리우스는 침울하고 위험한 음주 습관에 빠져들었다. 1900년 2월 셋째 딸 키르스티 Kirsti가 생후 15개월만에 장티푸스에 걸려 죽음을 맞이했다. 세 살 때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했던 시벨리우스에게 어린 딸의 죽음은 그를 극심한 슬픔과 고통에 몰아넣었다. 시벨리우스는 가족에게 닥친 어두운 그림자, 헬싱키의 소음, 그리고 술파티를 부르는 도시의 문화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의 천재적 재능을 아끼던 주변의 가까운 지인들 역시 시벨리우스가 조용하고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치유받으며 작곡에 몰두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아이놀라로의 이사는 그의 가족에게 반드시 필요한 변화였다. Ainola family in 1915 / Photo by Sundström Eric / Helsinki City Museum 슬픔을 마주할 용기 아이놀라의 거실을 들어서면 시벨리우스가 사용하던 피아노를 만날 수 있다. 그 피아노 옆 한 쪽 벽에 걸린 흑백 톤의 그림을 자세히 보면 죽어가는 소녀위에 엎드려 흐느끼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 1910년 핀란드 화가 오스카 빠르비아이넨 Oscar Parviainen의 작품 <기도>다. <아이의 죽음>으로도 불린다. 오스카에게 이 그림을 선물받았을 때 시벨리우스 부부는 키르스티의 죽음이 떠올랐다. 시벨리우스는 이 그림을 피아노 옆에 걸어두고 매일매일 곁에 없는 딸을 그리워하며 피아노를 연주하고 곡을 썼다. 그는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강렬한 비애의 감정을 다시 꺼내 마주하기로 했다. 망각의 상자에 숨겨두는 대신, 딸을 살아있는 현존의 시간으로 다시 부활시켜 슬픔대신 그리움으로 매일매일 더 사랑하고 더 기억하고 더 눈을 맞추며 바라보기로 했다. F Major Green 아이놀라에 들어서면 벽돌로 만들어진 초록색의 벽난로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시벨리우스 가족이 식사를 하던 다이닝 공간이다. 한 장 한 장의 벽돌을 일일이 손으로 굽고 색을 입혔기에 모든 벽돌의 초록색이 각기 다르다. 시벨리우스는 색을 소리로 듣는 재능을 가졌다. 그에게 빨강은 C 장조, 노랑은 D장도, 파랑은 A장조였다. 이 벽난로의 밝고 싱그러운 초록은 시벨리우스에게 ‘F장조 초록’이었다. 각기 떨어져 있던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고 지친 몸과 마음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식사 공간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색과 음이 있을까. 아이놀라는 예술가의 필요가 충족되고 상상이 현실로 살아나는 공간이다. 인생의 고난으로부터 안식을 얻는 곳이기도 하지만 또한 슬픔을 가장 솔직하게 마주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가장 자유롭게 고립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창조가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이지만 가장 인간적인 겸허하고 소탈한 자신의 모습 그대로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은방울꽃 언덕 위의 아이놀라는 시벨리우스에게 그런 집이었다. F장조 초록의 벽난로 벽난로 옆에 아이노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치열하고 수고로운 한 주를 보낸 이들에게는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를, 설레이는 새 한 주를 기다리는 이들에게는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 작품 47번을,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에게는 피아노 트리오 C장조 ‘Loviisa’를 권한다. 참조 : <Ainola : The Home of Jean and Aino Sibelius>, The Finnish Literature Society, 2015 본 글은 Seoul Property Insight에 기고되었던 기사입니다.